명상 일지
화두 참선이든 사띠 명상이든, 명상/참선에 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무념무상, 즉 생각이 끊어져야지 명상이 제대로 되고 있다는 편견입니다
사유와 숙고가 있는 초선을 지나 2선에 들면 그때부터는 생각과 말의 작용이 끊어지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그 경계를 목표로 하고 생각을 끊으려 하면 오히려 사마디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명상은 어떤 갈망이나 원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며, 이대로 다 좋다고 현존에 충실하게 깨어 있는 연습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선정도 견성도 바라지 않고, 성불이니 해탈 열반도 구하지 않습니다
구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 명상이고 선정이며, 구하려는 마음 자체가 가장 먼저 없애야 할 망상입니다
그저 들숨 날숨을 지켜보며 이 뭣고만 물을 뿐, 그 의문에 답을 구하거나 어설픈 답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물론 자아상을 만들어내는 전문가인 식온은 끊임없이 여러 관념적인 답을 만들어 내놓을 테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므로, 속아 넘어가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속아서 집착하지만 않는 한, 억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진다고 문제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떠도는 먼지나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내면 그뿐
그것을 만들어내고 지켜보며 알아차리는 나의 근본 자리만 이게 뭔고 돌이켜 자각하는 힘을 기르면 됩니다
이렇게 늘 사띠로 알아차리는 것을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 중 정념이라고 했는데,
사띠>위빠사나>반야의 통찰지를 키우기 위한 수행이라고 대념처경에 나옵니다.
중국에서는 지관의 관,
정혜의 혜라고 했으며, 간화선의 성성적적 중 성성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다만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는 신수심법 4군데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반면, 대승의 위빠사나나 화두선은 그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 자리를 관찰하여 알아차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결과는 같습니다
부처님도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같이 닦으라고 하셨듯이, 지관겸수 정혜쌍수 성성적적이란 한자식 표현들은 모두 고요한 집중과 명료한 통찰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통찰의 작용 없이 생각이 끊어진 고요함에만 만족할 경우, 즉 적적만 있고 성성이 빠지면 번뇌 망상이 여전히 잠복해 있어도 모르고 넘어가기 때문에, 선정에 든 동안은 일시적으로 그쳤던 탐진치 번뇌가 정에서 나오면 도로 치성해집니다
그래서 선정으로 최고 단계까지 배우신 부처님도 고요한 사마타 선정만으로는 번뇌의 뿌리를 뽑는 궁극적 해탈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시고, 극단적 고행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쳐 직접 계발하신 위빠사나, 통찰명상으로 무상정각을 이루신 것이지요 (보리수 아래 서)
지관의 지는 고요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관하는 통찰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생각을 멈추고 돌이키는 것,
이를테면 회광반조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선 수행이 참된 자기에 눈뜨는 여정이라면, 그저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의 평온함에 안주하지 말고 파도와 해일이 일어나 심연이 맨 밑바닥부터 한바탕 뒤집어져도 담담히 지켜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키워야겠지요
산사의 고요보다 저자 거리 한가운데서도 고요할 수 있는 참된 고요를 위해 오늘도 꾸준히 참구합니다
임제록 읽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길을 발견하고 내비게이션을 상세히 밝혀두신 시아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합니다
선의 스승이신 역대 조사들께 감사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마음의 법칙은 형상이 없어서 온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눈으로는 본다 하고, 귀로는 듣는다 하며, 코로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으로는 이야기한다고 하며, 손으로는 잡는다 하고, 발로는 바쁘게 걷는다 한다.
본래 깨끗하고 밝은 하나의 정화[일정명심]가 나뉘어 6화합이 돼 18계의 경험 세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한 마음마저 이미 없는 줄 알면 가는 곳마다 해탈이다.
산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수행자들이 이것저것 구하여 밖으로 치달리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저 옛사람들의 쓸데없는 기용과 방편 경계에 끄달려 놀아나기 때문이다.

임제록 [심법무형]
명상 일지
화두 참선이든 사띠 명상이든, 명상/참선에 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무념무상, 즉 생각이 끊어져야지 명상이 제대로 되고 있다는 편견입니다
사유와 숙고가 있는 초선을 지나 2선에 들면 그때부터는 생각과 말의 작용이 끊어지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그 경계를 목표로 하고 생각을 끊으려 하면 오히려 사마디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명상은 어떤 갈망이나 원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며, 이대로 다 좋다고 현존에 충실하게 깨어 있는 연습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선정도 견성도 바라지 않고, 성불이니 해탈 열반도 구하지 않습니다
구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 명상이고 선정이며, 구하려는 마음 자체가 가장 먼저 없애야 할 망상입니다
그저 들숨 날숨을 지켜보며 이 뭣고만 물을 뿐, 그 의문에 답을 구하거나 어설픈 답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물론 자아상을 만들어내는 전문가인 식온은 끊임없이 여러 관념적인 답을 만들어 내놓을 테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므로, 속아 넘어가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속아서 집착하지만 않는 한, 억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진다고 문제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떠도는 먼지나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내면 그뿐
그것을 만들어내고 지켜보며 알아차리는 나의 근본 자리만 이게 뭔고 돌이켜 자각하는 힘을 기르면 됩니다
이렇게 늘 사띠로 알아차리는 것을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 중 정념이라고 했는데,
사띠>위빠사나>반야의 통찰지를 키우기 위한 수행이라고 대념처경에 나옵니다.
중국에서는 지관의 관,
정혜의 혜라고 했으며, 간화선의 성성적적 중 성성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다만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는 신수심법 4군데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반면, 대승의 위빠사나나 화두선은 그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 자리를 관찰하여 알아차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결과는 같습니다
부처님도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같이 닦으라고 하셨듯이, 지관겸수 정혜쌍수 성성적적이란 한자식 표현들은 모두 고요한 집중과 명료한 통찰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통찰의 작용 없이 생각이 끊어진 고요함에만 만족할 경우, 즉 적적만 있고 성성이 빠지면 번뇌 망상이 여전히 잠복해 있어도 모르고 넘어가기 때문에, 선정에 든 동안은 일시적으로 그쳤던 탐진치 번뇌가 정에서 나오면 도로 치성해집니다
그래서 선정으로 최고 단계까지 배우신 부처님도 고요한 사마타 선정만으로는 번뇌의 뿌리를 뽑는 궁극적 해탈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시고, 극단적 고행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쳐 직접 계발하신 위빠사나, 통찰명상으로 무상정각을 이루신 것이지요 (보리수 아래 서)
지관의 지는 고요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관하는 통찰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생각을 멈추고 돌이키는 것,
이를테면 회광반조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선 수행이 참된 자기에 눈뜨는 여정이라면, 그저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의 평온함에 안주하지 말고 파도와 해일이 일어나 심연이 맨 밑바닥부터 한바탕 뒤집어져도 담담히 지켜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키워야겠지요
산사의 고요보다 저자 거리 한가운데서도 고요할 수 있는 참된 고요를 위해 오늘도 꾸준히 참구합니다
임제록 읽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길을 발견하고 내비게이션을 상세히 밝혀두신 시아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합니다
선의 스승이신 역대 조사들께 감사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마음의 법칙은 형상이 없어서 온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눈으로는 본다 하고, 귀로는 듣는다 하며, 코로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으로는 이야기한다고 하며, 손으로는 잡는다 하고, 발로는 바쁘게 걷는다 한다.
본래 깨끗하고 밝은 하나의 정화[일정명심]가 나뉘어 6화합이 돼 18계의 경험 세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한 마음마저 이미 없는 줄 알면 가는 곳마다 해탈이다.
산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수행자들이 이것저것 구하여 밖으로 치달리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저 옛사람들의 쓸데없는 기용과 방편 경계에 끄달려 놀아나기 때문이다.
임제록 [심법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