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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삼십이응신도 중 비구니 부분

20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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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삼십이응신도 중 비구니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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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성종대 비구니 도원(道圓)스님과 후기 18세기 무렵 여대사(女大師)로 칭해졌던 정유(定有)스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도원스님의 속명은 득비(得悲)이고, 젊어서는 향리의 아내였는데 남편이 죽자 절개를 지키다가 만년에 출가했다 한다. 그러다가 가야산 승려 도엄(道嚴)에게서 선(禪)을 배웠으며, 이후 정각암을 창건하고 이 절에 계속 머물렀다고 전한다.
오래전에 들으니 역리의 부인이(久聞郵吏婦)

백주의 풍도가 넘친다고 하였네(剩有柏舟風)

어찌 문벌을 논할 것이 있으랴 (何用論門地)

윤리 도덕은 만고에 통한다오 (民彛萬古通)

야호선을 이미 타파하였으니 (打散野狐禪)

수미산이 눈앞에 와 있도다 (須彌在目前)

칠십 나이에 정력이 매우 왕성하니 (耆年甚精猛)

응당 최고봉까지 오르리로다 (應上最高巓)

정유스님은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 의해 여대사(女大師)로 호칭된 비구니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에 의하면 ‘대사’로 불린 비구니는 고려시대 진효대사 외에 조선시대에는 이 정유대사가 유일하다.


억불시대에 비구니들은 조용히 몸을 낮춰 숨죽여 살아왔던 것이 아니다.

조선은 어떻게 비구니 전통이 끊어지지 않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인가? 가장 왕성한 활동이 있었지만 가장 쇠락하게 된, 가장 주체적이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이 조선 비구니들의 역사인 듯 하다. 이들의 구체적 생활은 어떠했을까? 불교의 고승들은 비구니의 이야기를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오히려 유교 사대부들의 기록에서 뛰어난 수행의 비구니 이름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개인사찰은 조선 말기 비구니 승단의 쇠락을 보여주는 한 단면인 듯 한다. 일제 통치가 시작되면서 조사한 한 통계에는 비구니 숫자가 비구의 10분의 1인 500명 내외였다. 비구니의 명맥이 자칫 끊어질 수도 있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조선시대 비구니 개인의 역사는 이처럼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면서 계속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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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도르제 팡모, 최끼 된마(Chokyi Dron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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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서구인이 찍은 11대 도르제 팡모와 비구 제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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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如苑 원주 眞澄寺 수좌 대승정 이토신소
⌜恒明의 誦⌟

▛일심의 “진심”을 담아 기도하라.

무슨일이든 순하게 받아들여 지혜의 눈을 떠라.

혜안을 열어 앞날을 밝게 보라.

신심을 不動으로 하라. 강하게 하라 ⎯▟